평등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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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제기한 핵심 통찰 중 하나-‘자본 창출의 중심이 노동에서 자본으로 이동한다’ 는 점이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않다. 공산주의 실패로 말미암아 자본론 자체를 헛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분명 적지 않지만, 생산 수단의 집중은 개개인의 경제적 가치를 희석시키며, 계급간의 사다리를 붕괴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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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에 대한 논의가 시대에 따라 다소 옮겨가고있다. 처음에는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와 같은 담론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감에 따라, 점차 평등에 대한 담론은 기회의 평등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농어촌 전형등을 통해 공정하게 제공받지 못한 교육의 기회를 보정하려는 고려등이 이에 해당한다. 모두가 기회의 평등을 가지게 되는 순간이 사실 제일 불평등한 순간이라고 생각하는데, 사회가 제도적으로 평등하다면 평등하지 않은 결과는 개개인의 잘못으로 고려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우사인 볼트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이에 따라 점차 equity등의 용어를 거쳐, 근래 평등에 대한 담론은 ‘법적 평등’에서 ‘기회의 평등’을 거쳐, ‘결과의 평등’으로 옮겨가고 있다. 진보 주의자는 결과의 평등을 주장하나, 보수 주의자는 오히려 역차별이라 주장한다. (이는 아주 당연한데, 진보와 보수의 중요한 차이 중 하나는 자원의 분배에 대한 시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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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성 측면에서, 마르크스가 말한 대로 자본이 자본을 생산하며 거대 자본이 세상을 독식하게 되었다. 인류의 총 생산은 분명 증가하였으나, 전체 파이에서 개개인이 차지하는 바는 확실히 줄어들었다. 즉, 실질 임금은 꾸준히 내려갔다. 올라간 생산성으로 말미암아 일부 부분에선 실질임금이 줄어들었다는 티가 나지 않았으나, 부동산등 한정된 재화를 놓고 보자면 유/무형 가치에서 분명 개인의 파이가 줄어들었다. 장점을 보자면, 더 많은 자본이 이룩하는 규모로 인한 기술의 고도화 및 생산성 증가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인류는 생산성 증가의 혜택을 온전히 보지 못하고있는데, 예전에 비해 자본이 한군데로 뭉쳐 정체되어 흐름 자체가 느려졌기 때문이다. 자본은 자본을 끌어들인다. 양적완화로 인한 숫자 증가는 금융자산으로 쉬이 흘러 들어간다. 이는 양극화로 나타난다. 소비 수요의 성장세가 생산성 증가세를 따라가지 못하고, 생산 능력의 증가가 고용 시장의 수요 창출로 이루어지지 못하며 실업이 구조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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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와중, 미래에는 분명 인류 자체의 생산이 필요없어지는 생산적 특이점이 존재할 것이다. 그로 인해 노동이 창출하는 자본의 크기가 자본이 창출하는 자본에 비해 아주 작아지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노동과 자본은 필연적으로 디커플링되거나, 아주 약한 연결고리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서야, 인간은 평등을 누리게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평등은 절대적 결과의 평등을 의미하지 않고, 노동의 가치가 전체 파이에 비해 아주아주 미약해졌기 때문에 누리게 되는 평등을 말한다. 다만 이는 충분한 자본 규제를 통하여 자본이 생산하는 자본의 흐름이 아래로 흐를 수 있도록 하여야 이룩 가능한 평등일 것이며, 어떤 의미로 만인의 결과의 평등과는 멀어지는 길이다. 이 ‘극단적 양극화의 평등’만이 인류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평등이다.